연금된 한 시인의 반성 / 고형렬
아까운 청춘 시절에 이런 작품밖에 쓰지 못했다
썩 가지고 나가게, 보기도 싫다
그런데 불가사의해, 매일 반성하고 조율했는데
왜 이것밖에 되지 않는 것이지,
다시 80년대 초의 신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다시 그 시대로 되돌려줄 수 없을까, 나의 언어와 청춘을
그리고 나의 시의 필연들을, 첫 시구를
왜 이 모양밖에 안되죠, 나는 죽고 싶다
더 먼 곳으로 데리고 가서 망각하게 하고 싶다
저토록 아프고 아까운 시간들이 있었는데
나는 어떻게 이 모양이죠, 정말 알 수 없는 일.
*출처: 고형렬 시집 『유리체를 통과하다』, 실천문학사, 2012.
*약력: 1954년 강원도 속초 출생, 창비 편집부장과 명지전문대학 문예창작과 겸임교수 역임.
시인이라면 좋은 시를 쓰고 싶은 욕심이 없다면 거짓이리라.
누구나 감탄할만한 시를 쓰고 싶은 마음이 언제나 꿈틀거리기 때문이다.
그런 욕심이 없다면 어찌 시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시 속의 화자는 신인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자책하며
연금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치는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어쩌랴, 시작(詩作)이라는 것이 본디 그런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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