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밤 귀뚜라미 울음 / 박형준
시가 써지지 않아
책상의 컴퓨터를 끄고 방바닥으로 내려와
연필을 깎는다
저녁 해가 넘어가다 말고
창호지에 어른거릴 때면
방문 앞에 앉아서 연필 칼끝으로
발뒤꿈치의 굳은살을 깎아내던
아버지처럼, 그것이 노동의 달콤함이고
그만의 소박한 휴식이었던 그 사람처럼
살아 계실 때 시골에서 쌀과 깻잎을 등에 지고
말씀 한 번 없이 내 반지하 방에 찾아오던 아버지
비좁은 방바닥에 엎드려 시를 쓰는 아들을 위해
벽을 사이에 둔 것처럼 돌아앉아
버릇처럼 발바닥의 굳은살을 떼어내던 사람
시가 써지지 않아 고개 들면
어느새 반지하의 창에 어른거리던 저녁 빛이
작고 구부정한 등에 실루엣으로 남아 있고
글씨 그만 쓰고 밥 먹거라
방해될까 봐 돌아앉지 못하고
내 등을 향한 듯한 그 사무치던 음성
밥과 같은 시
영원히 해갈되지 않으면서
겨우 배고픔만 면하게 해주던 시처럼
가을밤 귀뚜라미 울음
이제는 무디고 무디어진 연필심에서 저미어 나온다
*출처: 박형준 시집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문학과지성사, 2011.
*약력: 1966년 전북 정읍 출생, 명지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 박사.
박형준 시인은 유독 아버지의 그리움에 관한 시가 많다.
이 시도 그렇다.
시골에서 농사지은 것들을 등에 지고 서울로 올라온 아버지와
반지하 방에서 생활하는 아들의 정경이 정겹기도 하지만 가슴이 저리다.
가을밤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연필심에서 묻어나는 아버지의 그리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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