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論 / 마경덕
2002년 8월 10일
묵은 신발을 한 보따리 내다 버렸다.
일기를 쓰다 문득, 내가 신발을 버린 것이 아니라 신발이 나를 버렸다는 생각을 한다. 학교와 병원으로 은행과 시장으로 화장실로, 신발은 맘먹은 대로 나를 끌고 다녔다. 어디 한번이라도 막막한 세상을 맨발로 건넌 적이 있는가. 어쩌면 나를 싣고 파도를 넘어 온 한 척의 배. 과적(過積)으로 선체가 기울어버린. 선주(船主)인 나는 짐이었으므로,
일기장에 다시 쓴다.
짐을 부려놓고 먼 바다로 배들이 떠나갔다.
*출처: 마경덕 시집 『신발론』, 문학의전당, 2013.
*약력: 전남 여수 출생, 200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마을 문예대학 강사.
화자가 신발을 버린 것이 아니라 신발이 화자를 버렸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입장이 아니라 신발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역지사지이다.
“학교와 병원으로 은행과 시장으로 화장실로, 신발은 맘먹은 대로 나를 끌고 다녔다.”
그러니 신발은 화자를 싣고 “파도를 넘어 온 한 척의 배”였던 것이다.
이렇게 모든 사물과 사실을 달리 보고 달리 생각하므로 이런 시를 쓸 수 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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