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순서 / 신미나
나는 오리라 하였고 당신은 거위라 하였습니다
모양은 같은데 짝이 안 맞는 양말처럼
당신은 엇비슷하게 걸어갑니다
나는 공복이라 하였고 당신은 기근이라 하였습니다
당신은 성북동이라 하였고 나는 종암동이라 하였습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때 일치합니다
노인들이 바둑 두는 호숫가에 다시 와 생각합니다
흰 머리카락을 고르듯 무심히 당신을 뽑아냅니다
은행알을 으깨며 유모차가 지나갑니다
눈물 없이 우는 기분입니다
괜찮습니다, 아직은 괜찮아요 은행알도 초록인걸요
떼로 몰려드는 잉어의 벌린 입을 보세요
씨 없는 가시덩굴이 기어이 벽을 타고 오릅니다
*출처: 신미나 시집 『당신은 나의 높이를 가지세요』, 창비, 2021.
*약력: 1978년 충남 청양 출생, 200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 시작.
우리에게 사랑의 순서는 어떻게 매겨질까.
사랑이 맨 앞에 올 수도 끄트머리에 올 수도 중간에 올 수도 있다.
사랑의 순서가 다르다는 이유로 헤어지기도 한다.
부부 사이든 인간관계든 틀림이 아니고 다름을 인정할 때만이 관계를 지속할 수가 있다.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서로가 일치한다지만 어디 그게 쉬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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