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통증이 반짝일 때 / 박형진

믈헐다 2023. 10. 19. 23:37

통증이 반짝일 때 / 박형진

 

​연애편지를 쓰고 싶다

 

어쩌다 한 번

길에서 만난 사람일지라도

이제 막 긴 잠에서 깨어나는

저 붉은 튤립의 몸짓을 보면

 

연애편지를 쓰고 싶다

 

연둣빛 숲에 서 있는

나는 소년의 마음

아침 햇살과

타오르는 노을의 설렘으로만

밤 깊도록 연애편지를 쓰고 싶다

 

수많은 언어들이

우리 곁을 어지럽게 떠돌고

묵은 통증은 가슴에서

다시 화살처럼 반짝이는데

 

사랑한다 사랑한다고만 쓰고 싶다

너 없이는 못살겠다고만 쓰고 싶다

 

*출처: 박형진 시집 내 왼쪽 가슴속의 밭, 천년의시작, 2022.

*약력: 1958년 전북 부안 출생, 초등학교 졸업, 1992 창작과 비평을 통해 등단, 농부.

 

 

평생을 농부로 살고 있는 시인은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이다.

어쩌면 세상에 때 묻지 않은 그런 삶이 이렇게 맑고 고운 마음을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이 아프면 통증이 따르기 마련이지만, 시인에겐 그런 통증조차도 반짝이게 한다.

“묵은 통증은 가슴에서 / 다시 화살처럼 반짝”이니 말이다.

티 없이 맑고 깨끗한 소년의 마음이라야 가능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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