뻥의 나라에서 / 우대식
초등학교 3학년 막내와 돈키호테를 읽는 밤
11월 바람은 창을 두드리고
키득키득 책을 읽던 놈이
불현듯 묻는다
‘아빠 이거 다 뻥이지요’
그와 깊은 가을로 여행하는 중이다
뻥의 마을에서 서성이다가
어린 그와 목로주점에 들어
설탕을 듬뿍 탄 와인을 한 잔 시켜주고 싶은 것이다
독한 술 한 잔을 단숨에 마시면
창을 꼬나들고 달리는 늙은 기사도 만날 것이다
도무지 세상에는 없는
공주들과 긴 늦잠을 자고
풍차 아래서 휘파람을 불고 싶은 것이다
뻥이 없으면 이 세상은 도무지 허무하여
살 수 없음을 아이가 불현듯 깨닫기를
중세의 성당에 앉아 기도하고픈 것이다
*출처: 우대식 시집 『단검』, 실천문학사, 2008.
*약력: 1965년 강원도 원주 출생, 숭실대학교 졸업, 아주대학교에서 박사학위.
스페인 작가 세르반테스의 불멸의 명작인 ‘돈키호테’를 읽던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이 화자에게 느닷없이 묻는다.
“아빠 이거 다 뻥이지요?”
악당을 무찌르기 위해 길을 나선 돈키호테의 기행에 박수치며
신나게 읽었던 우리 시대와는 사뭇 다르다.
“뻥이 없으면 이 세상은 도무지 허무하여 / 살 수 없음을 아이가 불현듯 깨닫기를”,
유독 아들에게만 주는 말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주는 화두이리라.
세상은 온통 뻥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니 말이다. - 믈헐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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