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느티나무 그늘은 울기 좋은 곳이다 / 유은희

믈헐다 2023. 11. 8. 19:05

느티나무 그늘은 울기 좋은 곳이다 / 유은희

 

​​매미 울음 받아내기 위해

느티나무는 그늘을 펼치는 것이다

깊이 꺼내 우는 울음

다 받아주는 이 있어

그래도 매미 속은 환해지겠다

느티나무 발등 흥건하도록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전생을 쏟아야 하는 슬픔인 것이다

어깨가 넓은 느티나무 그늘은

울기 참 좋은 곳이어서

언뜻언뜻 하늘도 눈가를 훔친다

느티나무도 덩달아 글썽해져서

일부러 먼 산에 시선을 메어두고 있다

저녁 산이 붉어지는 까닭이다

느티나무 어깨에 기대어

울음 송두리째 꺼내 놓고 나면

매미 허물처럼 가벼워질까

사랑, 그 울음이 빠져나간 몸은

한 벌 허물에 불과할 테니

 

*출처: 유은희 시집 떠난 것들의 등에서 저녁은 온다, 천년의 시작, 2019.

*약력: 전남 완도 출생, 원광대학교 문예창작학과와 동 대학원 졸업.

 

 

남몰래 혼자서 실컷 울고 나면 속은 시원할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받아줄 이 없는 울음은 허망함이 밀려올 수 있기 때문이다.

울음을 안아주는 넓은 어깨처럼 울기 좋게 그늘을 만들어주는 느티나무는

“일부러 먼 산에 시선을 메어두고 있다 / 저녁 산이 붉어지는 까닭이다”

아무도 위로해주지 않는 울음 대신 붉어지는 저녁 산을 바라볼 때가 그렇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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