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暴雪) / 오탁번
삼동三冬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南道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天地가 흰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행성行星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내렸다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
우주宇宙의 미아迷兒가 된 듯 울부짖었다
―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쇼잉!
*출처: 오탁번 시집 『손님』, 황금알, 2016.
*약력: 1943년 충북 제천 출생,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와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23년 2월 14일 타계.
오탁번 시인은 우스갯소리에서도 시를 발견하는 안목과 토속적 우리말 사랑이 대단하다.
이장님이 눈과 사투를 벌이며 들려주는 비속어가 욕이라기보다 정감 어리기 때문이다.
기찻길 옆 오두막집은 살림살이는 넉넉지 않아도 부부간 금실이 좋아 다복하다고 했고,
남도 땅끝 외진 마을에 폭설이 내리는 날은 부부간의 사랑이 깊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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