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시집과 그것을 하다 / 김왕노

믈헐다 2023. 11. 21. 23:35

시집과 그것을 하다 / 김왕노

 

시집은 요염하게 삼베옷을 입은

여인처럼 온다. 곡비처럼 온다.

두 번째 페이지 하얀 속살에는

내 이름을 문신으로 새기고 온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깊어가는 밀애

우리 사랑 오르가슴에 닿았는지

멀리서 달려오는 까마득함

시집이 온 다음 날은 무리했는지

걸을 때마다 휘청거린다.

 

*출처: 김왕노 시집 복사꽃 아래로 가는 천년, 천년의시작, 2019.

*약력: 1957년 경북 포항 출생, 아주대학교 대학원 석사, 1992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꿈의 체인점으로 등단.

 

 

 

“시집이 온 다음 날은 무리했는지 / 걸을 때마다 휘청거린다”니,

시인이 시집을 출간하여 출판사로부터 시집을 받은 심경을 사랑 행위와 연결시켰다.

“시집과 그것을 한” 행위는 첫날밤을 치룬 신랑 신부처럼 말이다.

곡비 소리가 구슬프게 들리니 읽는 이도 흥분의 최고조에 이르지 않겠는가.

 

*참고

‘곡비(哭婢)’는 양반의 장례 때 주인을 대신하여 곡하던 계집종을 말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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