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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태 / 성윤석

명태 / 성윤석 당신을 바라보는 마음이, 내 옛 첫 마음이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 눈물을 뚝 뚝 흘리며 복사꽃 그늘에서 바다로 걸어 내려간 일이거나 흐려진 바다 상회들의 거리를 배회하며 노가리 코다리 명태 동태 황태 북어로 따로 이름 불리며 뜯기거나, 얼리거나, 바람에 실리거니, 얼어 바닥에 내팽개쳐지는 일이거나, 가끔은 당신이 나를 바라보는 일만큼이나 횟집 수족관 유리에 비치는 것이었는데 당신이 아는 사랑을 나에게만 얘기해주길 나는 속앓이도 접고 바랐는데 오늘은 첫 마음 같은 이름 그대로 남고 싶어 불러보는 명태 *성윤석 시집 『멍게』, 문학과지성사, 2014. *약력: 1966년 경남 창녕군 출생, 경남대학교 국문과 졸업. 명태는 싱싱한 생태, 얼린 동태, 말린 북어, 꾸덕꾸덕 노가리와 코다리 따위로..

며느리밥풀꽃 / 최두석

며느리밥풀꽃 / 최두석 입 안에 밥알 두 톨 물고 있네 가난을 잊은 육체와 영혼을 위하여 입 안에 밥 알 두 톨 한사코 물고 있네 고난의 세월을 잊은 육체와 영혼을 위하여 조붓한 입 안에 밥알 두 톨 한사코 물고 있네 흙에 떨구는 땀방울을 잊은 육체와 영혼을 위하여 *출처: 최두석 시집 『투구꽃』, 창비, 2017. *약력: ​1956년 전남 담양 출생,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와 동 대학원 국문과 졸업. ‘며느리밥풀꽃’의 설화를 시로 옮겼다. 못된 시어머니 밑에서 시집살이를 하던 며느리가 배가 고파 밥풀을 몰래 훔쳐 먹었다가 시어머니에게 맞아 죽어 혼이 꽃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는 구전이다. 밥알 속에 맺힌 눈물의 아픔을 보여주듯 “조붓한 입 안에 밥알 두 톨 한사코 물고 있네” 보릿고개를 겪어보지 않은..

낙과(落果) / 정호승

낙과(落果) / 정호승 내가 땅에 떨어진다는 것은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햇빛에 대하여 바람에 대하여 또는 인간의 눈빛에 대하여 내가 지상에 떨어진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다 내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그동안의 모든 기다림에 대하여 견딜 수 없었던 폭풍우의 폭력에 대하여 내가 책임을 다한다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책임을 지는 것이므로 내가 하늘에서 땅으로 툭 떨어짐으로써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출처: 정호승 시집 『슬픔이 택배로 왔다』, 창비, 2022. *약력: 1950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성장, 경희대 국문과와 동 대학원 졸업. “내가 땅에 떨어진다는 것은 /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내가 하늘에서 땅으로 툭 떨어짐으로써 /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이 두 구절만으로도 삶과 죽음에 대..

시인의 선물 / 최서림

시인의 선물 / 최서림 ​서리 맞고도 매달려 있는 홍시는 까치에게 줄 선물이다 내 유일한 사랑만큼이나 붉은 마당귀 아가위나무 열매 역시 어치에게 거저 주는 선물이다 갈매마을에서 세 들어 사는 땅콩만큼 작은 내겐 초겨울 저녁 하늘만 한 꿈이 있다 때죽나무 가지 끝에 걸린 감빛 노을을 엽서로 오려 부쳐주고 싶다 돈으로는 살 수도 없는 차이콥스키 협주곡처럼 낮게 깔린 안개, 둘레길에 수북이 쌓인 떡갈나무 잎은 타워팰리스에 사는 친구에게 한 박스 보낼 참이다 앞산의 갈대, 계곡물의 송사리, 이끼 낀 바위, 구절초와 감국 모두 값없이 받아 보내줄 게 너무 많다 하늘과 산과 들판은 줄 게 많은 나를 가장 사랑한다 *출처: 최서림 시집 『사람의 향기』, 시와에세이, 2019. *약력: 1956년 경북 청도 출생, 서..

코스모스​ / 이형기

코스모스​ / 이형기 언제나 트이고 싶은 마음에 하야니 꽃피는 코스모스였다. 돌아서며 돌아서며 연신 부딪치는 물결 같은 그리움이었다. 송두리째 희망도, 절망도, 불타지 못하는 육신 머리를 박고 쓰러진 코스모스는 귀뚜리 우는 섬돌가에 몸부림쳐 새겨진 어룽이었다. ​그러기에 더욱 흐느끼지 않는 설움 홀로 달래며 목이 가늘도록 참아내련다. ​까마득한 하늘가에 내 가슴이 파랗게 부서지는 날 코스모스는 지리. *출처: 이형기 시집 『별이 물되어 흐르고』, 미래사, 1991. *약력: 1933년 경남 진주 출생, 동국대학교 불교학, 2005년 향년 72세로 타계. “흐느끼지 않는 설움 홀로 달래며 / 목이 가늘도록 참아내련다.” 하늘거리는 코스모스의 생태적 인상에서 오는 연약함과 아름다움이, 가슴속에서 맹렬하게 일..

뻥의 나라에서 / 우대식

뻥의 나라에서 / 우대식 초등학교 3학년 막내와 돈키호테를 읽는 밤 11월 바람은 창을 두드리고 키득키득 책을 읽던 놈이 불현듯 묻는다 ‘아빠 이거 다 뻥이지요’ 그와 깊은 가을로 여행하는 중이다 뻥의 마을에서 서성이다가 어린 그와 목로주점에 들어 설탕을 듬뿍 탄 와인을 한 잔 시켜주고 싶은 것이다 독한 술 한 잔을 단숨에 마시면 창을 꼬나들고 달리는 늙은 기사도 만날 것이다 도무지 세상에는 없는 공주들과 긴 늦잠을 자고 풍차 아래서 휘파람을 불고 싶은 것이다 뻥이 없으면 이 세상은 도무지 허무하여 살 수 없음을 아이가 불현듯 깨닫기를 중세의 성당에 앉아 기도하고픈 것이다 *출처: 우대식 시집 『단검』, 실천문학사, 2008. *약력: 1965년 강원도 원주 출생, 숭실대학교 졸업, 아주대학교에서 박사학..

유혹 / 송영숙

유혹 / 송영숙 꽃차를 마신다 찻잔 속에서 출렁 겉잎 날개 폈다 접었다 시월의 마지막 날 부채춤 너울 접었다 폈다 어쩌자고 물속에서 새빨간 혀를 램프의 불꽃처럼 태우고 있는거야 너의 꽃술에 빨려 들어가 죽어버리고 싶다 *출처: 송영숙 시집 『벙어리매미』, 오름에디션, 2011. *약력: 1959년 대전 출생, 1993년 월간 〈시문학〉으로 등단, 호서문학상 수상. 꽃차는 오감을 느끼며 마실 수 있다. 찻잔 속에서 꽃잎이 춤을 추는 듯하니 눈이 즐겁고, 유리잔에 따르는 쪼르륵 물소리는 귀가 즐겁고, 깊고 은은한 향이 풍기니 코까지 즐겁다. 혀에 닿는 야릇한 맛과 온몸으로 느껴지는 훈훈함까지 더해지니, 시인은 오죽하면 “죽어버리고 싶다”고 하였을까. - 믈헐당 -

갈 사람 가느라 가을입니다만 / 이원규

갈 사람 가느라 가을입니다만 / 이원규 봄은 환하게 다 보여 봄입니다만 그대 얼굴이 잘 안 보이니 여름은 열나게 생각만 열어 여름이고요 가을은 갈 사람 가느라 가을입니다만 코로나 19 희망도 없이 KF 마스크로 서로의 얼굴을 가리니 포옹도 입맞춤도 없이 마침내 복에 겨운 날들이 가고 지구촌의 사계는 힘겹고 지겨운 겨울 복면의 겨울은 겹고 겨워 겨우내 겨울이니 아무 반성도 없이 여전히 그대는 나의 백신입니다만 *출처: Daum & NAVER. *약력: 1962년 경북 문경 출생, 고등학교 1학년 자퇴,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 계명대학교 경제학과 입학 후 휴학, 1984년 《월간문학》에 시 〈유배지의 풀꽃〉으로 등단. 가을을 노래한 시를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참 많다. 그만큼 가을은 시인의 감성을 자극하..

시월 / 목필균

시월 / 목필균 파랗게 날 선 하늘에 삶아 빨은 이부자리 홑청 하얗게 펼쳐 널면 허물 많은 내 어깨 밤마다 덮어주던 온기가 눈부시다 다 비워진 저 넓은 가슴에 얼룩진 마음도 거울처럼 닦아보는 시월. *출처: Daum & NAVER. *약력: 1954년 출생(女), 춘천교육대학교 졸업, 성신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과 졸업. 시월을 노래한 시를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참 많다. 그만큼 시월은 시인의 감성을 자극하기 좋은 달인 것 같다. 사실 이 시가 실린 시집을 찾을 수 없어 그냥 마음에만 담아둘까 하다가 그러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삶아 빨은 이부자리 홑청 / 하얗게 펼쳐 널면” 금세 파랗게 물들일 것 같기 때문이다. 시월이 가기 전에 파란 하늘처럼 내 마음에 얼룩도 닦아보는 것이 어떨까. ..

빈말이 아니다 / 서정홍

빈말이 아니다 / 서정홍 하루하루 늙어 간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이고 다행한 일인가 하찮은 욕심과 집착 다 내려놓고 새처럼 훨훨 떠날 수 있어 벌써 마음이 설렌다 빈말이 아니다 *출처: 서정홍 시집 『그대로 둔다』, 상추쌈, 2020. *약력: 1958년 경남 마산 출생, 마창노련문학상(1990), 전태일문학상(1992), 서덕출문학상(2013) 수상, 경남 합천에서 농사를 지으며 ‘담쟁이 인문학교’ 운영. “하루하루 늙어 간다는 게 / 얼마나 큰 축복이고 다행한 일인가” “하찮은 욕심과 집착 다 내려놓고 / 새처럼 훨훨 떠날 수 있어 / 벌써 마음이 설렌다”는 말을 믿어도 될까? 밑지고 판다는 장사꾼, 죽어도 시집 안 간다는 노처녀, 빨리 죽고 싶어 하는 노인의 마음과는 달리 시작과 끝이 “빈말이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