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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말 / 김용택

빈말 / 김용택 꽃집에 가서 아내가 꽃을 보며 묻는다. 여보, 이 꽃이 예뻐 내가 예뻐. 참 내, 그걸 말이라고 해. 당신이 천 배 만 배 더 예쁘지. *출처: 저자 김용택 · 그림 이순구, 『웃는 가족』, 뜨인돌, 2017. *약력: 1948년 전라북도 임실 출생, 순창농고 졸업 후 초등학교 교사가 되면서 시를 썼다. ‘빈말’과 ‘거짓말’은 사전적 의미상 미묘한 차이가 있다. 어쨌거나 둘 다 상대를 기분 좋게 한다면 사전적 의미와는 다르게 긍정적 말일 수 있다. 시인은 아내에게 꽃보다 천 배 만 배 예쁘다고 한 말이 결코 빈말은 아닐 것이다. 사실 꽃이 아무리 예쁘다한들 내 아내보다 더 예쁠 수가 있겠는가. - 믈헐당 -

국화차 / 조향미

국화차 / 조향미 ​찬 가을 한 자락이 여기 환한 유리잔 뜨거운 물 속에서 몸을 푼다 인적 드문 산길에 짧은 햇살 청아한 풀벌레 소리도 함께 녹아든다 언젠가 어느 별에서 만나 정결하고 선한 영혼이 오랜 세월 제 마음을 여며두었다가 고적한 밤 등불 아래 은은히 내 안으로 스며든다 고마운 일이다 *출처: 조향미 시집 『그 나무가 나에게 팔을 벌렸다』, 실천문학사, 2006. *약력: 1961년 경남 거창 출생, 부산대학교 국어교육과 졸업, 중등 교사 출신. “찬 가을 한 자락이 은은히 내안으로 스며든다는 것이 고마운 일”이라는 자기성찰과 국화차를 마시면서 “정결하고 선한 영혼”을 느끼니 천생 시인이다. 환한 유리잔에 녹아드는 국화차 한 잔에 자연과 교감하며 물아일체에 빠져든다면 어디 고마운 일이 하나둘이겠는..

추수 / 박형진

추수 / 박형진 ​원시적 마음일까 나락 익는 가을 들판에서 비록 남의 일이지만 한나절 벼를 베고 막걸리 한 잔에 드는 이 마음 이 들판이 다 내 것 같은 마음 원시적 마음이겠지 너와 내가 없고 내 것 네 것이 없고 우리 것이어서 비로소 내 것인 것 내 것이 없으므로 진정 내 것인 것 흥겨워라 추수하는 마음이여! ​ *출처: 박형진 시집 『내 왼쪽 가슴속의 밭』, 천년의시작, 2022. *약력: 1958년 전북 부안 출생, 초등학교 졸업, 1992년 『창작과 비평』을 통해 등단, 농부. 평생을 농부로 살고 있는 시인은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이다. 욕심 없는 삶이었기에 추수하는 농부의 마음을 이렇게 흥겹게 나타냈으리라. 예로부터 농민들이 농번기에 농사일을 서로 돕는 ‘두레’라는 조직이 있다. “너와 내가 없고..

물 흐르듯이 / 성원근

물 흐르듯이 / 성원근 한 장의 땅과 한 겹의 하늘이 있으면 내 잠자리는 편안하다. 땅은 땅으로 하늘은 하늘로 곧 그만인 것을. 내 마음에 부질없이 먹구름이 끼었다 비가 내렸다 바람 불면 밑도 끝도 없이, 냇물 흐르는 소리 그리워한다. 저 물 따라 내내 흘러가 버릴 것을. *출처: 성원근 유고시집 『오, 희디흰 눈속 같은 세상』, 창작과비평사, 1996. *약력: 1958년 경남 밀양 출생, 연세대학 영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1995년 향년 38세로 타계. 시인은 물처럼 살았다는 것을 이 시를 통해 여실히 보여준다. “한 장의 땅과 / 한 겹의 하늘이 있으면 / 내 잠자리는 편안하다.”하였으니, 이 얼마나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인가. “내 마음에 부질없이 / 먹구름이 끼었다 / 비가 내렸다 / 바람 불..

재춘이 엄마 / 윤제림

재춘이 엄마 / 윤제림 ​재춘이 엄마가 이 바닷가에 조개구이 집을 낼 때 생각이 모자라서, 그보다 더 멋진 이름이 없어서 그냥 '재춘이네' 라는 간판을 단 것은 아니다 재춘이 엄마뿐이 아니다 보아라, 저 갑수네, 병섭이네, 상규네, 병호네 ​재춘이 엄마가 저 간월암(看月巖) 같은 절에 가서 기왓장에 이름을 쓸 때 생각나는 이름이 재춘이 밖에 없어서 '김재춘'이라고만 써놓고 오는 것은 아니다 재춘이 엄마만 그러는게 아니다 가서 보아라, 갑수 엄마가 쓴 최갑수, 병섭이 엄마가 쓴 서병섭, 상규엄마가 쓴 김상규, 병호 엄마가 쓴 엄병호 재춘아. 공부 잘해라! *출처: 윤제림 시집 『그는 걸어서 온다』, 문학동네, 2009. *약력: 본명은 윤준호, 1960년 충북 제천에서 나고 인천에서 성장, 동국대학교 국어..

만추 / 김왕노

만추 / 김왕노 입 안에서 조약돌같이 남몰래 굴리고 굴리던 이름 하나 자면서도 입 안에서 이름을 굴리는 소리 메아리가 되어 나를 흔들었나. 놀라 가랑잎처럼 깨어난 밤 이름 하나가 내내 서럽다. *출처: 김왕노 시집 『백석과 보낸 며칠간』, 천년의 시작, 2022. *약력: 1957년 경북 포항 출생, 아주대학교 대학원 석사, 199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꿈의 체인점’으로 등단. “입 안에서 조약돌같이 / 남몰래 굴리던 이름 하나”는 누구에게나 있음직하다. 김춘추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고 했고, 소월은 “산산이 부서지는 이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이라 했다. 김왕노 시인은 “이름 하나가 내내 서럽다”고 한다. 마..

벽돌 한 장 / 배영옥

벽돌 한 장 / 배영옥 ​유모차 안에 갓난아기도 아니고 착착 쌓은 폐지 꾸러미도 아닌, 벽돌 한 장 달랑 태우시고 가는 할머니 제 한 몸 지탱할 수 있는 가장 적당한 무게가 벽돌 한 장의 무게라는 걸까 붉은 벽돌 한 장이 할머니를 겨우 지탱하고 있다 느릿한 걸음으로 이쪽으로 저쪽으로 옮겨 다니는 유모차 할머니 너무 가벼운 생은 뒤로 벌렁 넘어질 수 있다 한평생 남은 것이라곤 벽돌 한 장밖에 없다는 듯이 허리 한 번 펴고 더 굽어지는 할머니 벽돌 한 장이 할머니를 고이고이 모셔간다 *출처: 배영옥 시집 『뭇별이 총총』, 실천문학사, 2011. *약력: 1966년 대구 출생,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 2018년 향년 53세로 별세. 허리 굽은 할머니가 폐지나 빈 병 따위를 실은 유모차를 밀고 가..

브래지어를 풀고 / 김나영

브래지어를 풀고 / 김나영 브래지어 착용이 유방암 발생률을 70%나 높인다는 TV를 시청하다가 브래지어 후크를 슬쩍 풀어 헤쳐본다 사랑할 때와 샤워할 때 외엔 풀지 않았던 내 피부 같은 브래지어를 빗장 풀린 가슴으로 오소소― 전해오는 시원함도 잠깐 문 열어놔도 날아가지 못하는 새장 속에 새처럼 빗장 풀린 가슴이 움츠려든다 갑작스런 허전함 앞에 예민해지는 유두 분절된 내 몸의 지경이 당혹스럽다 허전함을 다시 채우자 그때서야 가슴이 경계태세를 푼다 와이어와 후크로 결박해야 비로소 안정을 되찾는 나는 문명이 디자인한 딸이다 내 가슴둘레엔 그 흔적이 문신처럼 박혀있다 세상 수많은 딸들의 브래지어 봉제선 뒤편 늙지 않는 빅브라더가 있다 *출처: 김나영 시집 『수작』, 애지, 2010. *약력: 1961년 경상북도..

통증이 반짝일 때 / 박형진

통증이 반짝일 때 / 박형진 ​연애편지를 쓰고 싶다 어쩌다 한 번 길에서 만난 사람일지라도 이제 막 긴 잠에서 깨어나는 저 붉은 튤립의 몸짓을 보면 연애편지를 쓰고 싶다 연둣빛 숲에 서 있는 나는 소년의 마음 아침 햇살과 타오르는 노을의 설렘으로만 ​ 밤 깊도록 연애편지를 쓰고 싶다 수많은 언어들이 우리 곁을 어지럽게 떠돌고 묵은 통증은 가슴에서 다시 화살처럼 반짝이는데 사랑한다 사랑한다고만 쓰고 싶다 너 없이는 못살겠다고만 쓰고 싶다 *출처: 박형진 시집 『내 왼쪽 가슴속의 밭』, 천년의시작, 2022. *약력: 1958년 전북 부안 출생, 초등학교 졸업, 1992년 『창작과 비평』을 통해 등단, 농부. 평생을 농부로 살고 있는 시인은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이다. 어쩌면 세상에 때 묻지 않은 그런 삶이 ..

파꽃 / 손창기

파꽃 / 손창기 파 속을 파먹는 건 꽃 속의 씨앗들인가 파 속을 먹으면 먹을수록 땅 밑부터 껍질에 힘줄이 생긴다 뼈가 박힌다 제 목을 굽혀본 적 없는 파꽃 남에게 씨앗은 될지언정 단 한 번도 식탁에 오르지 못한 파꽃 모가지를 꺾고 나서야 곁줄기들 속이 부드러워지는 것이다 그렇게 굽힐 줄 알아야 옆자리가 몰랑몰랑해진다 *출처: 손창기 시집 『달팽이 聖者』, 북인, 2009. *약력: 1967년 경북 군위 출생, 영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경북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 ​파꽃 / 이문재 파가 자라는 이유는 오직 속을 비우기 위해서다 파가 커갈수록 하얀 파꽃 둥글수록 파는 제 속을 잘 비워낸 것이다 꼿꼿하게 홀로 선 파는 속이 없다 *출처: 이문재 시집 『제국호텔』, 문학동네, 2004. *약력: 1959년 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