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시는, 시를 견디라며 / 박완호

믈헐다 2023. 8. 19. 03:44

시는, 시를 견디라며 / 박완호

 

시는, 시를 견디라고 내게 온다.

어제의 나를 견디고

여태 짊어지고 있던 불행을 더 끌어안으라고.

이런 개새끼, 귀가 다 헐도록 들어온

수모와 욕설까지 한꺼번에

나를 찾는다. 그날,

비 내리는 무심천 울먹이는 물그림자

툭하면 꺼지려 들던 불꽃의 어린 심지

앙다문 입술 사이 실금처럼

일그러지던 글자들. 시는

어떻게든 오늘을 버텨내라며

어제처럼 나를 일으켜 세운다. 온 힘을 다해

지평선을 밀어버리려는 사내*를 보라며

경계에 설 때마다 머뭇거리는

나를 싸움판으로 떠밀어댄다.

 

*유홍준 시, 「지평선」

 

*출처: 박완호 시집 문득 세상 전부가 되는 누군가처럼, 북인, 2022.

*약력: 1965년 충북 진천 출생,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91 동서문학으로 등단.

 

시는 어떤 사람들이 쓰고 시인이 되는 것일까.

보통은 사연이 깊은 사람일 거라는 막연한 생각이 든다.

그런 사람일수록 시에 기대어 숨통을 트기 때문이다.

요즘은 아픔과 상처보다는 일상적인 생활이 묻어나는 시가 많다.

그런 시들이 편안하게 읽히기도 하지만 가슴속까지 진득이 밀려들지는 않는다.

마음과 마음의 공명에서 출발하는 울림이 없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여태 짊어지고 있던 불행을 더 끌어안으라고.”

“어떻게든 오늘을 버텨내라며 / 어제처럼 나를 일으켜 세운다.”

그것이 시를 쓰게 하는 원동력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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