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다발 / 임수현
대각선으로 짧게 자르세요
꽃집 점원은 한 다발의 꽃을
내게 안기며 당부한다
목이 좁은 꽃병은 한 다발이 버거웠지만
그래서 불안
아름다운 물관
당신과
금붕어를 동시에 키우고 싶었나 봐
왜 자꾸 뻐끔뻐끔
숨이 찰까
오래가요?
오래가요!
질문과 답이 한 종이에 있는 오픈 북 시험처럼
처음 금붕어란 이름의 금붕어를 찾아 서로의 무늬를
지우면 더 오래 헤엄칠 수 있었을까?
우리가 함께라면
서로의 무늬로
비스듬히 어깨를 기대도 좋았을 거야
끝끝내 우리는 서로를 알 수 없어
뿌옇게 흐려질 수 있었다
어항도 되고 꽃병도 되는
이곳에서는
모두가 한순간이라고 말한다
*출처: 임수현 시집 『아는 낱말의 수만큼 밤이 되겠지』, 걷는사람, 2021.
*약력: 경북 구미에 살며 푸른빛이 어스름한 금오산을 좋아한다. 2016년 창비어린이 동시 부문 신인문학상, 2017년 시인동네 시 부문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목이 좁은 유리 꽃병에다 아래쪽엔 금붕어가 놀고 위쪽엔 꽃을 키운다면
언젠가 금붕어도 꽃을 피울 수 있을지 막연한 생각을 하는 시인이다.
같은 환경에서 같은 음식을 먹고 살면 닮아가는 부부처럼 말이다.
부부가 닮아가는 것은 환경의 영향이 가장 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오래 살아도 지독하게 닮지 않는 부부도 있을 것이다.
“어항도 되고 꽃병도 되는 / 이곳에서는 / 모두가 한순간”일 터인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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