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양의 식탁 / 김영미
해는 꼭
주방 창문에 와서
떨어진다
그때는
내가 칼질에 몰두할 때다
토마토를 얇게 저미고
당근을 채 치고
김치전을 마름모꼴로
썰어낼 때다
그때마다 해는 꼭
내 칼질에 걸려들 뿐이다
나의 칼질에는
명분이 있어
똑 똑 소리 나지만
눈동자를 향하는
칼끝은 막을 수 없어
나는 촛대에 해를 꽂는다
어떤 나라에선
초경을 축하하기 위해
팥밥을 지어 먹는다지
흰 냅킨을 펼치며
나는 칼처럼 반듯해진다
*출처: 김영미 시집 『맑고 높은 나의 이마』, 아침달, 2019.
*약력: 1975년 양수에서 태어나 구리에서 성장, 서울시립대학교 철학과 졸업, 201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저녁준비를 하는 여느 주부의 모습으로
저녁의 석양빛이 부엌을 물들일 때 도마를 물들이는 칼질이다.
그 광경이 참 여유롭게 느껴진다.
사실 주부들에겐 하루 일과 중 식사 준비가 제일 힘들 것이다.
어떤 음식을 준비해야 하는지도 늘 고민거리일 터이지만
“흰 냅킨을 펼치며 / 나는 칼처럼 반듯해진다”는 석양의 아름다운 식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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