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석양의 식탁 / 김영미

믈헐다 2023. 8. 26. 23:41

석양의 식탁 / 김영미

 

​해는 꼭

주방 창문에 와서

떨어진다

 

그때는

내가 칼질에 몰두할 때다

 

토마토를 얇게 저미고

당근을 채 치고

김치전을 마름모꼴로

썰어낼 때다

 

그때마다 해는 꼭

내 칼질에 걸려들 뿐이다

 

나의 칼질에는

명분이 있어

똑 똑 소리 나지만

 

눈동자를 향하는

칼끝은 막을 수 없어

나는 촛대에 해를 꽂는다

 

어떤 나라에선

초경을 축하하기 위해

팥밥을 지어 먹는다지

 

흰 냅킨을 펼치며

나는 칼처럼 반듯해진다

 

*출처: 김영미 시집 맑고 높은 나의 이마, 아침달, 2019.

*약력: 1975년 양수에서 태어나 구리에서 성장, 서울시립대학교 철학과 졸업, 2012 현대문학으로 등단.

 

 

저녁준비를 하는 여느 주부의 모습으로

저녁의 석양빛이 부엌을 물들일 때 도마를 물들이는 칼질이다.

그 광경이 참 여유롭게 느껴진다.

사실 주부들에겐 하루 일과 중 식사 준비가 제일 힘들 것이다.

어떤 음식을 준비해야 하는지도 늘 고민거리일 터이지만

“흰 냅킨을 펼치며 / 나는 칼처럼 반듯해진다”는 석양의 아름다운 식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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