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메이저리거 / 윤선

믈헐다 2023. 11. 15. 05:05

메이저리거 / 윤선

 

엄마는 선수였다

한 번의 연습도 없이

 

주위 사람 아무도 아프게 하지 않고

선수답게 떠났다

 

가끔 호스피스 병동 엄마 침실에 숨어들어

방아깨비처럼 말라 버린 엄마 곁에서

아침까지 잠들었다가 들키는 일은 있었지만

 

해가 바뀔 때마다

응급실에서 마지막 인사를 연습하던 큰언니보다

멋진 헬멧을 쓰고 오토바이를 하늘까지 몰고 간

작은오빠보다 오래 살았다

 

자식들 하나둘

몸 가르는 경기까지 다 지켜보면서

당신의 홈에서 품었던 새끼들이

죽음의 문턱까지 달렸을 때도

당신의 피와 살을 긁어 그 문턱을

마르고 닳도록 닦고 닦더니

안간힘을 다해 문턱의 금을 짓뭉개 버렸다

 

아무도 선수를 선수답게 대접해 주지 않았지만

엄마는 선수였다

 

살아 있는 날은 계속 삼진이었지만

죽음 앞에서 멋진 홈런을 날린 거다

 

죽음을 몇 번 연습한 우리는

세상의 공명으로 떨리는 새가슴을 움켜잡으며

엄마의 뜨끈한 희생타를

오래 끌어안고

이렇게 떨고 있다

 

*출처: 윤선 시집 별들의 구릉 어디쯤 낙타는 나를 기다리고, 걷는사람, 2023.

*약력: 경북 의성에서 과수원집 막내딸로 태어남, 2018 시와반시 신인상 수상.

 

 

 

“엄마는 선수였다 / 한 번의 연습도 없이 // 주위 사람 아무도 아프게 하지 않고 / 선수답게 떠났다”

슬픈 사연이 하나 더 숨어 있다.

“멋진 헬멧을 쓰고 오토바이를 하늘까지 몰고 간 / 작은오빠보다 오래 살았다”

자식을 먼저 보낸 어미의 마음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어머니의 삶에서 날린 홈런이 얼마나 있을까마는 홈런보다 더 귀한 희생타였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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