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세상/출석부 826

저문 외길에서 / 박남준

저문 외길에서 / 박남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미어져가는 것 그는 모르는지 길 끝까지 간다 가는데 갔는데 ​기다려본 사람만이 그 그리움을 안다 무너져내려본 사람만이 이 절망을 안다 저문 외길에서 사내가 운다 소주도 없이 잊혀진 사내가 운다 *출처: 박남준 시집 『그 숲에 새를 묻지 못한 사람이 있다』, 창비, 1995. *약력: 1957년 전남 영광 출생, 1984년 시 전문지 [시인]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우리 모두는 한 번쯤 사랑에 실패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것들 대부분은 흘러간 시간 속에서 추억이 된다지만, 때론 잊고 싶어도 절대로 잊히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리움이 아닐까. “소주도 없이 잊혀진 사내가 운다”는 건 그리움을 안다는 것이리라. “저문 외길”에서 말이다.

마중 / 허림

마중 / 허림 사랑이 너무 멀어 올 수 없다면 내가 갈게 말 한마디 그리운 저녁 얼굴 마주하고 앉아 그대 꿈 가만가만 들어주고 내 사랑 들려주며 그립다는 것은 오래전 잃어버린 향기가 아닐까 사는 게 무언지 하무뭇하니 그리워지는 날에는 그대여 내가 먼저 달려가 꽃으로 서 있을게 *출처: 허림 산문집 『보내지 않았는데 벌써 갔네』, 달아실, 2021. *약력: ​1960년 강원도 홍천 출생, 강릉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이 시는 윤학준 작곡으로 2014년 화천 비목콩쿠르에서 창작 가곡 1위를 차지하였다. 이어 소프라노 조수미의 한국가곡 탄생 100주년을 맞아 발표한 앨범의 타이틀곡이기도 하다. “사랑이 너무 멀어 올 수 없다면 내가 갈게”라는 첫 문장이 참 좋다. 쉬운 말 같지만 그 속에 담긴 절절한 마음..

메이저리거 / 윤선

메이저리거 / 윤선 엄마는 선수였다 한 번의 연습도 없이 주위 사람 아무도 아프게 하지 않고 선수답게 떠났다 가끔 호스피스 병동 엄마 침실에 숨어들어 방아깨비처럼 말라 버린 엄마 곁에서 아침까지 잠들었다가 들키는 일은 있었지만 해가 바뀔 때마다 응급실에서 마지막 인사를 연습하던 큰언니보다 멋진 헬멧을 쓰고 오토바이를 하늘까지 몰고 간 작은오빠보다 오래 살았다 자식들 하나둘 몸 가르는 경기까지 다 지켜보면서 당신의 홈에서 품었던 새끼들이 죽음의 문턱까지 달렸을 때도 당신의 피와 살을 긁어 그 문턱을 마르고 닳도록 닦고 닦더니 안간힘을 다해 문턱의 금을 짓뭉개 버렸다 아무도 선수를 선수답게 대접해 주지 않았지만 엄마는 선수였다 살아 있는 날은 계속 삼진이었지만 죽음 앞에서 멋진 홈런을 날린 거다 죽음을 몇 ..

아내 / 유승도

아내 / 유승도 ​닭 한 마리를 붙잡아 다리를 묶어 처마 밑에 놓으며 빨리 잡아주고 갈까? 물으니 어이구 잡는 건 내가 더 잘 잡는데, 그냥 놔두고 어서 갔다 오세요 아내도 산짐승이 다 됐다 *출처: 유승도 시집 『사람도 흐른다』, 달을쏘다, 2020. *약력: 1960년 충남 서천 출생, 경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해발 800미터의 영월 망경대산 중턱에 위치한 외딴집. 시인은 25년 전, 아내와 백일 된 아들과 함께 강원도 영월 산골 오지로 들어왔다 산에 산다는 건 한 마리 산짐승으로 살겠다는 거다. 그렇다고 아내에게까지 산짐승으로 살기를 바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아내도 자연스럽게 산짐승이 됐다. 닭 잡는 거도 그렇지만 염소가 예쁘다고 말하며 염소탕을 맛있게 먹는 아내이기 때..

보여줄 수 없다 / 안현심

보여줄 수 없다 / 안현심 홀로 저녁밥을 먹으며 소주를 마셨다 안주라곤 맹물국수에 걸쳐 얹은 묵은지 한 가닥 그런데, 왜 눈물이 날까 누구에게도 내색하고 싶지 않은 가시 그것이, 심통을 부리는가 보다 *출처: 안현심 시집 『그래서 정말 다행이에요』, 문학의전당, 2023. ​*약력: 1957년 전북 진안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 국문학과 졸업, 한남대학교 문학박사. “누구에게도 내색하고 싶지 않은 가시”는 아무에게나 보여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 아프지 않고 서럽지 않고 좋은 시를 쓰기는 어렵다. 마음속 깊이 박혀 있는 가시는 늘 수많은 생각에 빠지게 한다. 그것이 아름다운 상상력으로 승화시켜 응축하고 압축해 시로 만들 수 있다. 오랫동안 숙성되어 푹 익은 김장 김치처럼 말이다.

수목장 / 박지웅

수목장 / 박지웅 유골함에 드신 지 몇 해 묘원 숲길에서 우연히 만났네 갈참나무 아래 도토리를 안은 예쁜 아버지 ​죽어서도 열심히 식량을 모으시네 *출처: 박지웅 시집 『나비 가면』, 문학동네, 2021. *약력: 1969년 부산 출생,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화자가 본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다람쥐일 것이다. 그러나 다람쥐의 그런 모습에서 죽은 아버지를 만나는 것이다. 다람쥐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이어주는 매개 역할을 하니 말이다. 살아생전에도 그렇듯 “죽어서도 / 열심히 식량을 모으시네”

늦가을 / 성원근

늦가을 / 성원근 ​먼 하늘에 별이 하나 떨어진다. 거리에서 한 가닥 음률을 달고 낙엽이 구른다. 무거운 외투 속에서 선명히 내다보이는 세상, 나뭇가지에 내일 눈이 쌓일 것이다. *출처: 성원근 유고시집 『오, 희디흰 눈속 같은 세상』, 창작과비평사, 1996. *약력: 1958년 경남 밀양 출생, 연세대학 영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1995년 향년 38세로 타계. 시집을 펼치면 제일 먼저 ‘시인의 말’이 눈에 들어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시집은 유고시집이기 때문에 시인의 말이 없다. 시인은 안타깝게도 첫 시집을 내기 1년 전 38세의 젊은 나이로 “먼 하늘에서 별이 하나 떨어”지듯 먼 곳으로 떠났다. 세브란스병원에 시신 및 안구 기증을 하고 떠났으니, “무거운 외투 속에서 / 선명히 내다보이는 세상”..

국화가 피는 것은 / 길상호

국화가 피는 것은 / 길상호 ​바람 차가운 날 국화가 피는 것은, 한 잎 한 잎 꽃잎을 펼 때마다 품고 있던 향기 날실로 뽑아 바람의 가닥에 엮어 보내는 것은, 생의 희망을 접고 떠도는 벌들 불러 모으기 위함이다 그 여린 날갯짓에 한 모금의 달콤한 기억을 남겨 주려는 이유에서이다 그리하여 마당 한편에 햇빛처럼 밝은 꽃들이 피어 지금은 윙윙거리는 저 소리들로 다시 살아 오르는 오후, 저마다 누런 잎을 접으면서도 억척스럽게 국화가 피는 것은 아직 접어서는 안 될 작은 날개들이 저마다의 가슴에 움트고 있기 때문이다 *출처: 길상호 시집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 걷는사람, 2018. *약력: 1973년 충남 논산 출생, 한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국화 꽃잎들은 바람이 불..

느티나무 그늘은 울기 좋은 곳이다 / 유은희

느티나무 그늘은 울기 좋은 곳이다 / 유은희 ​​매미 울음 받아내기 위해 느티나무는 그늘을 펼치는 것이다 깊이 꺼내 우는 울음 다 받아주는 이 있어 그래도 매미 속은 환해지겠다 느티나무 발등 흥건하도록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전생을 쏟아야 하는 슬픔인 것이다 어깨가 넓은 느티나무 그늘은 울기 참 좋은 곳이어서 언뜻언뜻 하늘도 눈가를 훔친다 느티나무도 덩달아 글썽해져서 일부러 먼 산에 시선을 메어두고 있다 저녁 산이 붉어지는 까닭이다 ​ 느티나무 어깨에 기대어 울음 송두리째 꺼내 놓고 나면 매미 허물처럼 가벼워질까 사랑, 그 울음이 빠져나간 몸은 한 벌 허물에 불과할 테니 *출처: 유은희 시집 『떠난 것들의 등에서 저녁은 온다』, 천년의 시작, 2019. *약력: 전남 완도 출생, 원광대학교 문예창작학과와..

느티나무 / 신달자

느티나무 / 신달자 혼자 되고 첫 고향길 큰길 두고 외곽길 고요히 돌아 어릴 적 업히고 업어 주던 느티나무 앞에 서다 아무 말 않고 서로 삭은 등을 바라본다 엄마 보듯 뜨거워지는 목줄기 *출처: 신달자 시집 『어머니, 그 삐뚤삐뚤한 글씨』, 문학수첩, 2001. *약력: 1943년 경남 거창 출생, 숙명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혼자된 후 고향 길에 찾은 느티나무 앞에서 서로 삭은 등만 바라봅니다. 긴 세월을 넉넉함과 따뜻함으로 감싸주는 느티나무 같은 어머니, 햇볕과 비바람을 막아주는 당신의 품이 그립습니다. 오랜 세월 초록빛 기쁨을 안겨주었으니 더 그렇습니다.